잿빛의 미제 사건: 어느 순간의 데자뷔
Aurora 2022. 12. 2.회의실에 들어온 유즈는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펼쳤다. 매우 간결한 문장 몇 개가 적힌 종이에서는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야마토가 그것을 들고 천천히 읽었다.
다시 돌아가는 무대는 아주 즐거울 거야. 그렇지? 미즈하라みずはら 형사님.
여름 휴양지가 유명한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3년 전처럼 해보는 건 어떨까?
이번에 도망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 도망친다면, 그건 그거대로 재밌겠지만.
“도망치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라….”
“이게 경시청으로 날아온 편지예요. 아무래도 나가노일 것 같아서 보냈던 협조 공문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와봤는데… 보란 듯이 범행을 이미 저질렀더군요.”
“그러네요…. 나가노현에는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카루이자와가 있으니까요.”
“맞아! 나도 어릴 때 아빠랑 카루이자와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끼어든 코난이 책상에 팔을 올리고 유즈를 빤히 쳐다봤다. 유즈는 그런 아이를 보며 살포시 웃은 후,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며 시선을 편지로 돌렸다. 일주일 하고도 며칠 전에 상부에서 온 연락에 너무 위험하다며 노발대발하던 제 동기가 생각나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입꼬리가 올라가려 했다. 노발대발하던 사람을 간신히 잠재워서 이 자리에 온 것이지만.
타카아키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는 것을 보며 우에하라가 물었다.
“3년 전의 마지막 범행도 나가노 아니었나요? 그때 전체적인 총괄은 미즈하라 경부님께서 담당이셨죠?”
네. 그리고 그냥 미즈하라 씨로 충분할 것 같아요. 눈을 깜빡여 상념을 털어낸 유즈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모았다. 어딘가 불편한 숨소리와 가지런한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우에하라는 잠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띄웠다. 우에하라가 건넨 따뜻한 머그컵에 유즈는 눈인사를 건네고 그것을 감쌌다. 창백한 손이 머그컵에서 옮겨온 온기로 점차 제 색을 찾아갔다. 한참을 말이 없던 타카아키가 마지막 문장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도망치다, 라는 것은 미즈하라 씨를 의미하는 거겠군요.”
“…그렇겠죠. 3년 전, 나가노에서 발생했던 네 번째 범행으로 수월하게 좁혀가던 수사망이었는데…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둔 뒤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적해서 어떤 정보도 소용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범인은 제가 싸움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나 봐요.”
“그게 무슨… 예전부터 이미 범인을 특정하고 계신 거였나요?”
“네. 이름은 나오키 시게루예요. 여기에는 없지만, 편지 봉투에 쓰여있기도 해요. 제 이름처럼 히라가나로만 이루어져 있지만요. 나이는… 3년 전에는 35세였으니, 지금은 38세가 됐겠네요.”
우에하라는 그 정도를 알면 되지 않느냐면서 유즈를 바라봤다. 타카아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새 자료를 넘겨받아 조사를 해봤고, 38세의 나오키 시게루는 흔적도 없다며 그는 오늘 현장과 사건을 정리한 파일을 두 장 정도 넘겼다. 타카아키의 손가락이 가리킨 부분은 상처 부위였다. 역시 예리하시네요. 미즈하라 씨가 이야기한 것을 놓치지 않았을 뿐이죠. 희미한 미소를 지은 유즈가 펜을 들고 빈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야마토마저 감탄할 정도로 거침없이 손을 놀려 그림 4개를 그린 유즈는 특정 부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펜을 내려놓았다. 몇 번이고 봤던 사진이다. 시간이 흘렀어도 유즈의 머릿속에는 모든 것이 생생했다.
“이게 3년 전에 있었던 4개의 사건의 상처 부위예요.”
“표시하신 이 부분이… 다르네요?”
“네. 3년 전에는 톱니가 달린 독특한 모양의 칼을 사용했어요. 피부 끝부분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죠. 그 덕에 용의자를 좁히고, 특정하기까지가 나름 수월했지만요.”
“지금은 단순한 식칼로 보이는군요.”
그 말은 아마 얼굴도, 이름도 바꿔버렸을 용의자를 특정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뜻이에요. 야마토가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코로와 먼저 탐문 수사를 하러 나가겠다는 말에 우에하라가 다급히 쫓아 나갔다. 같이 가, 칸쨩!! 코난은 유즈와 타카아키를 번갈아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이 다녀도 되는 건가. 유즈가 코난을 가볍게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부터 가실 건가요? 모로, 후시 경부님. 머뭇거리는 기색에 코난이 유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평온을 가장한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에 코난은 말없이 유즈의 목에 팔을 감고 편하게 안겼다. 어린아이의 따뜻한 온기에 유즈는 조금 마음을 가라앉혔다.
“모리 씨와 함께 왔니?”
“네…. 아저씨가 갑자기 나가노에 간다고 하셔서 의문이었는데, 유즈 형 때문이었군요?”
“들켰네. 하긴… 에도가와 군한테까지 숨겨지리라고는 생각 안 했답니다.”
유즈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코난의 등을 토닥였다. 여긴 나가노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카아키가 그런 유즈에게 잠시 시선을 주다가 짧게 여러 번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먼저 나간 두 사람이 회사 쪽으로 간다는군요. 우리는 집으로 가서 이웃들을 만나봐야겠어요.”
“아, 네.”
“집이 멀어요, 모로후시 경부님?”
“30분 정도 걸릴 것 같군요. 차로 이동하시죠.”
타카아키는 회의실의 문을 열고 작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유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각자 이동하는 것보다 함께 움직이는 게 효율이 좋을 것 같다는 유즈의 말에 타카아키는 발걸음을 돌려 그를 제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음…. 제가 에도가와 군과 뒷좌석에 앉아도 괜찮으실까요? 어린아이 혼자 뒤에 태우는 건 역시 불안해서….”
“그러도록 하죠.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자, 에도가와 군. 조심히 타야 해요.”
“네-에!!”
유즈는 차의 잠금을 풀고 뒷좌석의 문을 먼저 열어준 타카아키에게 눈으로 감사를 전하며 코난을 천천히 내려줬다. 코난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유즈가 트렁크 쪽으로 빙 돌아 반대쪽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를 본 타카아키 또한 운전석의 문을 열고 차에 탑승했다. 유즈는 겉옷 주머니에서 쉴새 없이 진동을 울리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약간의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통화 거절 버튼을 주욱 밀고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코난은 안 봐도 비디오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창밖을 구경했다.
마지막-겨우 세 명째지만-으로 만날 사람은 피해자의 앞집에 사는 35세의 아키에 키노코 씨였다. 늦은 시간에 울린 초인종에 짜증을 내던 그는 설명을 듣더니 매우 놀란 얼굴로 가슴을 붙잡았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에게 봉변이 일어났다는 말에 많이 놀란 듯, 심호흡을 몇 번 하는 것을 코난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키에는 그들을 집에 들이며 부엌으로 가서 식칼 여러 종류를 보여주었다. 이게 다입니다. 사건이 일어났을 시간대에 혼자 외출 중이었다며, 이를 증명해줄 사람은 없다는 말에 유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협조 감사합니다. 혹시 유나 씨에 대해 더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이쪽으로….”
“그렇게 할게요.”
유즈가 명함을 건네고 뒤를 돌았다. 조금 늦게 그를 따라 뒤를 돈 코난은 아키에가 명함을 받고 히죽 웃는 얼굴을 발견했다. 어쩐지 조금 소름이 돋는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발을 놀려 유즈의 손을 잡고 다시 타카아키의 차에 올라탔다. 코난은 그 사실을 일단 묻어두기로 했다.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수사에 진척이 보이면 연락주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운전하는 거 괜찮아요? 눈이라도 붙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철야 후 운전 정도는 익숙하고… 무엇보다 모리 씨가 저에게 에도가와 군을 맡기셔서요.”
우에하라의 걱정을 뒤로 하고 유즈는 액셀을 밟았다. 조수석에 앉은 코난이 불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내일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일 갔다가, 아무로 군에게 혼나기는 싫어. 두 분 정말 돈독하세요. 어머, 우리도 잘 알아요, 에도가와 군. 가지가지 하시네요. 코난은 나오려던 말을 꾹 눌렀다.
도쿄와 나가노를 오가며 조사를 시작한 지 약 2주. 미즈하라 유즈는 나가노에서 온 연락에 급하게 헬기에 탑승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즈는 헬기에서 내려 그를 기다리던 타카아키의 차를 얻어타고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차 안은 조용했다. 침묵이 익숙한 듯 타카아키는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짧은 시간 동안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도착한 사건 현장의 앞에서 익숙한 차를 보자마자 목발을 짚으며 달려온 야마토가 타카아키가 차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공명! 대기해!!”
“무슨 일이죠?”
“이번 사건은 맡겨두고 그냥 돌아- 야!!”
타카아키는 고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먼저 들어간 유즈를 따라 대문에 발을 들였다. 뒤에서 야마토가 따라오며 연신 그를 불렀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자세한 사정을 알려주지 않는 자의 말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정원의 구석진 곳에서는 머리에 거즈를 붙인 어린 학생이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아이일 것이라 여기며 유즈는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뒤에서 공명, 그러니까 모로후시 타카아키를 부르는 야마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유가 조금 궁금했지만 사건에 집중하려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속도가 줄더니, 멈춰버린 발에 뒤에서 따라오던 타카아키 또한 그의 뒤에 멈춰서고 말았다.
“…….”
“미즈하라 씨. 왜 그러시,”
의문 섞인 말이 멈췄다. 어렴풋이 들리는 울음기가 가득하면서도 침착하려 노력하는 아이의 증언에 무언가가 겹쳐졌다. 감식반이 나오며 열린 현관문의 틈 사이로 흥건한 피와 널부러진 시체가 보였다. 그러니까, 꼭, 7년 전의 어느 날 들었던, 그의 유일한 이해자의……. 말로만 듣고, 사건 파일에서만 봤던 현장과 똑같았다. 유즈는 숨을 헐떡이며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밖으로 새어 나오는 이름을 막을 수 없었다.
“……미츠. …히로, 미츠…….”
경악한 티가 나지 않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생생한 현장이었다. 타카아키는 작게 들려오는 그리운 이름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호흡을 이어가기 괴로워 보이는 어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도닥였다. 진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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