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에는 이름을 불러주세요.
Aurora 2022. 12. 18.“있잖아요, 아무로 씨.”
“네, 라키아.”
“당신이 다 죽어가는 날 살려준 게 이번이 두 번째잖아요.”
그렇죠. 아무로 토오루는 어느새 떠날 채비를 마치고 그를 돌아보는 이에게 답했다. 이름은 라키아, 나이는 스물아홉, 어딘가 위험한 조직에서 일하고 있음. 고작 두 번의 만남으로 알게 된 정보는 이것이 다였다. 아무로는 낯선 보살핌에 어색해하던 라키아를 떠올리며 삐죽 튀어나온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라키아가 민망한 듯 볼을 긁고 입을 열었다.
“…다음에 세 번째로 만날 일이 생기면, 그때는 진짜 이름으로 불러줄래요?”
“역시, 라키아가 본명이 아니었던 거죠?”
“당연하죠. 지금은 그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지만. 진짜 이름은 그때 알려줄게요. 잘 있어요, 아무로 씨. …고마웠어요.”
처음 보여주는 미소와 함께 라키아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눈을 깜빡했더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으니까. 정말 신출귀몰 하다니까. …다음엔 언제 만나게 될까? 이름은 뭘까?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아무로는 후덥지근한 여름밤의 바람을 쐬었다.
라키아가 인사를 건네고 떠난 지 두 달 정도가 흘렀다. 아무로는 항상 그랬듯이 익숙하게 포와로의 마감을 하고 문을 나섰다.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을 끝낸 후에 돌아본 바로 옆의 골목에, 익숙한 인영이 기대앉아 있었다. …라키아? 알아봐 주네요. 색색이는 숨소리에 아무로가 다급한 손놀림으로 라키아를 안아 올렸다. 세 번째도 이렇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내 일이잖아. 라키아는 조금 키득이고 익숙한 듯 아무로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무로는 조수석에 라키아를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몸을 일으키고 물러나려던 순간 옷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툭 내치면 바로 떨어질 정도의 힘에 아무로가 의아한 얼굴로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 눈을 마주했다. 마주한 눈빛은 두 달 전의 것과 비슷했다.
“이번이, 세 번째잖아요.”
“….”
“유즈. 내 이름, 유즈예요.”
“……유즈 씨.”
응. 라키아는 만족했다는 듯 눈을 감고 잡고 있던 아무로의 옷을 놓았다. 아무로는 볼을 긁적이고 조수석의 문을 조심히 닫았다. 아무로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 때까지 라키아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병원을 생각했다가 첫 만남 때 그럴 바엔 이대로 버리고 가라고 했던 라키아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로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던 까칠한 얼굴을 생각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천천히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무로는 라키아를 침대에 눕혔다. 안아서 옮기는 동안 정신을 차렸는지 눕히자마자 벌떡 일어나려던 라키아의 이마를 꾹 눌러서 다시 눕힌 아무로가 방을 나섰다. 아무로는 간단하게 소독할 약품과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말 그대로 만신창이인 겉모습과 달리 상처가 적은 몸에 아무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피는 다 어디에서 묻혀온 거예요?”
“나랑 싸운 놈들…? 앗, 따가!”
라키아가 상처에 닿은 소독약에 짧은 비명을 지르고 부루퉁한 얼굴로 아무로를 올려다보았다. 그 열렬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아무로는 태연한 얼굴로 상처를 마저 소독하고, 말라서 굳어버린 피를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냈다. 일련의 과정들을 대충 마친 아무로는 더러워진 수건과 라키아의 옷 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네받은 티셔츠로 갈아입은 라키아가 그런 아무로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까와는 달리 거센 힘에 아무로는 깜짝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았다.
“유즈 씨?”
“옆에, 있어 주면 안 돼? …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던 아무로가 푸스스 웃고 라키아의 이마에 제 것을 맞댔다. 조금 따끈한 게, 해열제를 하나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무로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것만 정리하고 올게요. 얌전히 누워있어요.”
“…네.”
라키아가 바르게 누워 그를 올려다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아무로는 뒤를 돌아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라키아가 얼마 전 협력자가 된 작은 아이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역시, 당신 하나면, 더 바랄 게 없어. 그러니까, 할게. 뭐든지.
그날, 라키아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카페 포와로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만남을 가지는 대신에 그가 제시한 조건은 단 하나였다. 아르바이트생인 아무로 토오루가 출근하지 않는 날일 것. 이 정도는 제가 속한 조직을 낱낱이 파헤친 후 괴멸까지 바라는 어떤 꼬마 탐정에게는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으리라. 라키아가 방긋 웃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주문했다. 일행이 두 명 더 올 예정이라서요. 아마도? 네, 감사합니다.
“꽤 상냥하네요, 당신. 어이, 하이바라. 괜찮으니까 좀 나와봐.”
“난 원래 상냥해. 특히 어린아이에게는. 정말 괜찮으니까 꼬마 탐정의 뒤에서 나와주지 않을래? ‘셰리’.”
“……정말 당신이구나, 라키아.”
잊지 않았네? 샐쭉 웃은 라키아가 자리를 잡는 하이바라의 앞으로 주스가 담긴 잔을 밀어주었다. 미심쩍은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는 하이바라에게 독 같은 건 타지 않았다고 알린 라키아는 제 몫의 음료를 쭈욱 들이켰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에도가와 코난의 조건은 간단했다. 조직 내부의 정보를 조금씩 빼내어 줄 것과 셰리… 그러니까 하이바라 아이의 생존과 APTX4869를 먹고 유아화가 된 사실을 비밀에 부칠 것. 라키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말하는 말간 얼굴에 이제야 조금 안심한 하이바라가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조건은 뭐야? 라키아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바라의 앞으로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슬쩍 밀어준 라키아는 그대로 뒤를 돌아 포와로를 나섰다.
“내 조건은 하나야. …아무로 토오루의 안전을 지켜줄 것.”
아무로는 말랑한 라키아의 볼을 쿡쿡 찔렀다. 금세 잠들어버렸잖아. 해열제 좀 먹이려고 했더니. 찝찝한 듯 해열제를 몇 번 만지작거린 아무로가 조용히 속삭였다.
“…잘 자요, 유즈 씨.”
아무로가 라키아의 옆에 조용히 누워 함께 잠들고 난 아침에 발견한 풍경은, 텅 빈 옆자리였다. 벌떡 일어나 거실로 향한 아무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메모지였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모를 메모지를 손에 쥐고 아무로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대로 주르륵 냉장고에 기대앉았다. 머릿속이 온통 검은 머리에 푸른 회안을 가진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놀랐죠? 미안해요. 어제는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서 많이 다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그러고 앉아서 기다렸어요. 이건 치료하는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나 지금 좀 위험한 상태예요. 내가 겁이 조금 많아서, 아무로 씨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르게 나가요. 미안해요. 이상한 사람들이 카페나 집 근처에 찾아오더라도 무시해요. 꼭. 아니면 위층에 사는 탐정님에게 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거기엔 꼬마 탐정님도 계시니.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반드시 다시 올 테니까, 기다려줘요. …그때도 이름으로 불러줘요. 안녕.
라키아 유즈.
당신을 좋아해.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아. 꼭 무사히 도망쳐서 다시 이곳에 올 거야. 내 발로. 있잖아, 아무로 씨. …네 번째도, 받아줄 거야?
라키아는 스코프 너머로 진과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라키아…! 잔뜩 열이 오른 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라키아가 웃었다. 네 머리통은 꼭 내가 날릴 거라고 그랬잖아. 익숙한 담배 냄새에 얼굴을 찌푸린 라키아가 라이플을 분해해 정리했다.
“라이, 내 옆에서 담배는 자제해줬으면 한다고 했잖아요.”
“언제까지 라이라고 부를 셈이지?”
라키아는 짧게 헛웃음을 뱉고 가방을 멨다. 아마도 평생. 따라오지 마요. 느릿한 발걸음을 눈으로 좇은 아카이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발로 짓이겨 불을 끄고 남은 연기를 뱉으며 저 멀리 앞서있는 라키아의 뒤를 따랐다.
“따라오지 말라고!!”
“출구는 한 군데뿐이다만.”
“……진짜 짜증 나!!!”
곧고 하얀 손가락이 머뭇거리다가 초인종을 꾹 눌렀다. 누른 후에도 주먹을 쥐었다 펴며 정신없던 손이 문이 열림에 따라 멈췄다.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라키아라는 이름을 진정으로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세요?”
초인종을 누른 후 한참을 답이 없는 상대방에 의아해하며 아무로는 현관문을 열었다. 의아했던 얼굴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늦었네요.”
“…혹시, 나 기다렸어요?”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요.”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이라서. 아무로는 어깨를 으쓱이고 아주 오랜만에 마주하는 이를 잡아끌었다. 유즈는 저항 없이 집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할 말, 내가 먼저 해도 돼요? 응? 동의한 걸로 알고 말할게요. 좋아해, 유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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